문헌 및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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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스케스의 카탈루냐 세계지도
(1375)

출처
프랑스국립도서관, 파리, 프랑스
수량

아르메니아의 그리스도교 수도원을 찾아서

태초에 지도가 있었다

이식쿨은 8세기 초에 중국과 이슬람에서 제작된 지도들에서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그러나 특히 흥미를 끄는 지도는 14세기에 제작된 매우 뛰어난 카탈루냐-마요르카 세계지도이다. 마요르카 섬은 아랍, 카탈루냐, 이탈리아, 유대인 문화의 영향을 받은 중요한 무역 중심지였다. 마요르카에서 제작된 지도들은 수준 높은 디자인이 특징이며 ‘완벽한 기술’로 만들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이 지도는 1375년에 지도 제작자 아브라함 크레스케스Abrahma Cresques가 만들었다. 지도책 5-6면에는 아시아 대륙과 중앙아시아에 대한 전설과 설명이 실려 있지만, 중요한 정보는 별로 없다. 예외적으로 흥미를 끄는 것은 이식쿨 호수인데, 지도상으로 타원형 모양을 하고 있으며 동서로 뻗어 있는 모습은 실재와 흡사하다. 게다가, 호숫가에는 한 건물이 그려져 있고 다음과 같은 설명문이 달려 있다. “이곳은 이식쿨이라 불린다. 이곳에는 아르메니아 수도원이 자리 잡고 있는데, 사도이자 복음서 저자인 마태오 성인의 유골이 있었다고 한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1450년에 페라라 시 출신의 에스텐체Estenze가 원형으로 제작한 또 다른 세계 지도이다. 이 지도에는 수도원으로 가는 길이 그려져 있지만 이식쿨은 물론 다른 호수나 장소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다음과 같이 간단히 적혀 있을 뿐이다. “이것은 마태오 성인과 아르메니아인들의 유해를 보존하고 있는 수도사들의 수도원이다.” 아마도 에스텐체와 크레스케스가 언급한 것은 같은 출처일 것이다.


최초의 탐험가들

러시아 여행가 세메노프P.P. Semenov는 1850년대 초 베네치아에서 크레스케스의 지도를 보았다. 그는 지도에 이식쿨 호수가 그려져 있다고 기록했다. 북쪽에는 “중동의 나라들로부터 아시아로 도망쳐 와서 12세기에 이식쿨 호숫가에 수도원을 세운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교인들의 수도원”이 있었다. 세메노프는 또한 수도사들이 거친 물결로부터 안전하고 물고기가 풍부한 퀸게이 만의 장소를 선택했다고 추측했다. 1856년에서 1857년까지 이식쿨을 다녀온 후, 세메노프는 다음과 같이 썼다. “퀴르멘티 만은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호숫가나 인접한 호숫가의 퇴적물에서 내 가정을 뒷받침할 만한 어떤 물체도 발견하지 못했다.”

반세기 후, 러시아 정교회 수도원이 이 지역에 세워졌다. 학자인 바르톨트V.V. Bartold와 화가 두딘Dudin은 수도원 동쪽으로 호숫가에 “정방형 둑으로 둘러싸인 꽤 큰 성채의 유적과… 성채 지역이 많은 작은 구릉지들로 뒤덮여 있음”을 보았다.

그로부터 반세기 후에, 고고학자 베른시탐A.N. Bernshtam은 유적지에서 답사 발굴을 실시했고, 8~10세기와 10~12세기 두 시기에 정착지가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시 반세기가 흐르자 수도원은 모든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다. 그 수도원과 마태오 성인의 유골과 중세의 정착지에 대해 논의할 때에는 역사적, 고고학적, 신학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것들은 오로지 전문가와 고고학자에 의해서만 ‘판독될’ 수 있고 발굴, 복원, 보존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학계에 소개될 것이다. 그리고 전체적인 그림의 완성은 신학자들의 몫이다.

비슈케크와 중앙아시아의 대주교 블라디미르Vladimir는 2002년에 《투르크 총대주교의 후예들의 땅The Land of Descendants of Patriarch Turk》을 펴냈는데, 이 책에서 그는 이식쿨을 비롯한 현재 키르기스스탄 영토에 그리스도교가 존재했다는 신학적 증거를 서술했다.

블라디미르가 밝혔듯이 “거룩한 사도이자 복음서 저자인 마태오 성인의 유해는 키르기스 땅에서 안식을 찾았다.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시리아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다 순교했다. 사도의 유해는 2, 3세기에 고대 로마에서 도망쳐 관용을 베풀기로 유명한 곳을 찾아 나선 그리스도교인들에 의해 이곳으로 옮겨졌다. 그 신성한 유해는 이식쿨 호숫가에 있는 수도원에 모셔져 있었고 전 그리스도교계가 그 위치를 알고 있었다. … 한참 후 고대 아르메니아 수도원이 있던 도시는 호수의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고고학 연구

이 정보 덕분에 러시아 수중 연맹 소속 잠수부들과 함께 이식쿨 해안과 물밑에서 답사 작업이 시작될 수 있었다.

2005년 답사팀이 정착지 현장을 찾아 퀴르멘티 만의 물밑으로 들어가면서 퀴르멘티 정착지에 대한 새로운 단계의 고고학적 조사가 시작되었다. 지역 주민들은 그곳을 신성하게 생각하고 있다. 자야치 반도(수백 년 전에는 섬이었다)에는 카타콤과 수도원 암자로 이루어진 자연 동굴 복합 건물이 있다. 19세기의 중세 그리스도교 수도원 유적과 하층토 구성이 유사한 덕분에 그곳 유적의 연대에 대해 몇 가지 설명이 가능하게 되었다. 연로한 주민들에 따르면, 30미터 길이의 이 동굴 건물은 두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40년 전만 해도 접근이 가능했던 아래층은 대략 30개의 수도원 암자로 나뉘어 있었다. 현재는 입구가 막혀 있다. 좀 더 조사를 하려면 건물을 복원해야 한다. 유적지 곳곳에서는 커다란 그릇(khoum)과 박판 도기 잔해를 비롯하여 엄청난 양의 중세 도자기와 벽돌 등이 발견되었다. 안쪽에 노란 유약을 바른 온전한 물병도 출토되었다.

고대 퀴르멘티 정착지를 촬영한 항공사진을 보면, 그곳은 사각형 배치에 외곽 길이는 1킬로미터가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대의 정착지는 양쪽에서 감싸고 있는 깊은 협곡과 배수가 만들어 낸 깊은 방벽으로 삼면이 보호되고 있다. 남쪽 벽은 지세의 기복을 따라 이어져 있는데, 협곡으로 이르는 비탈에 지어져 있다. 성벽의 동쪽 면과 서쪽 면에 있는 공터 및 정착지 한 가운데에는 약간 도드라진 땅이 있다. 정착지 남쪽 구역에는 지름 2.5m, 깊이 5~6m의 구덩이가 있다.

이 부근에서 2003년 네 개의 십자가 무늬로 장식된 은색 부적이 발견되었다.

이 정착지와 퀴르멘티 인근에서 선대와 당대에 수집된 고고학적 유물로는 청동 십자가, 장식이 달린 인장용 반지, 알록달록한 묵주 등이 있다.

주로 추이 계곡과 이식쿨 부근에서는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현재까지 24개의 십자가 목걸이가 출토되었다.

무덤 부장품, 묘비, 도자기 등에서 십자가 형상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흥미롭게도 암각화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렇게 수많은 발견이 이루어진 덕분에 유형에 따라 그것들을 설명하고 분류할 수 있게 되었다.

수중 유물에 대해 다시 알아보기로 하자. 수중 유물로는 호수 북쪽 면 수심 5-6미터에서 발견된 다윗의 별이 그려진 커다란 도자기 파편, 측면에 육각형 별이 새겨져 있는 온전한 도자기, 호수 남쪽 면에서 발견된 십자가가 새겨진 묘비 등이 있다. 심하게 산화된 청동거울 조각과 터키식 허리띠에 (아랍어로 ‘신의 축복’을 의미하는 ‘barakat’이라고) 청동으로 새겨진 글씨가 발견되었다. 수심 7m에서는 온전한 청동 그릇이 발견되었는데, 카라한 칸국 시대(11-12세기)의 것이었다.


중세 수도원을 찾아서

그리스도교에 대해 수집되고 분석된 모든 고고학적 자료들 덕분에 이식쿨 호수에 있는 아르메니아 수도원 사안이 연구될 수 있었다. 중세에 아르메니아 선교사들이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은 새로운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종교 건축물을 세웠다.

아르메니아 공동체가 현재의 키르기스스탄 영토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은 1375년의 카탈루냐 세계지도 같은 기록 자료들로 확인된다. 카탈루냐 세계지도에 실린 정보는 비슈케크에서 나온 묘비에 대한 아르메니아와 시리아의 기록들로 확인된다.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시리아 교회에 속해 있었다. 아르메니아인들의 존재를 입증하는 중요한 출처 하나는 비석의 비문인데, 두 개의 언어로 적힌 이 비문은 1323년의 것이다. 비슈케크 공동묘지에서 발견된 이 비문은 아르메니아 주교 요한(Ovannesa)의 것인데, 아르메니아어와 시리아어 두 언어로 쓰였다. 이 사실은 이 지역에 아르메니아 정착지가 있었다고 믿을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포고스Pogos》 같은 시리아-네스토리아의 저작들에서 아르메니아식 이름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교 상징을 비롯한 고고학적 유물과 지역 전설 기록에 대해 연구하고, 발굴하고, 수집하다보니 반도에 있는 고대 정착촌과 카타콤들이 중세 수도원의 단일 건축물일 것이라고 추측된다. 반도의 지형에 대한 더 많은 연구를 통해 인근 언덕이 카타콤 언덕과 건축학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가설을 확인하려면, 새롭고 포괄적인 고고학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연구자들은 이식쿨에서 발견된 그리스도교 문화의 특성에 대해 여전히 연구 중인데, 주로 개인 차원의 조사 경험과 직관에 의지하고 있다. 새로운 역사적‧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고고학적 유물 및 기록 자료들을 체계화하고 분류하려는 어떤 노력도 환영한다.

지속적이고 꾸준한 고고학적 탐험과 근본적인 역사적 조사만이 과거의 수수께끼를 풀고 현대 학자들의 가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가설은 답사 작업과 정기적인 현지 조사에 근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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