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및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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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루냐 지도책 7번째 쪽

출처
프랑스국립도서관, 파리, 프랑스
수량

키르기스스탄을 여행하는 사람들이라면 꼭 읽어야 할 이야기

키르기스 산맥 고원에 위치한 이식쿨 호수의 아르메니아 수도원은 그리스도교의 가장 위대한 유물을 품고 있다. 14세기의 카탈루냐 세계지도에 따르면, 사도이자 복음서 저자인 마태오 성인이 유골이 이곳에 묻혀 있다고 한다.

이식쿨은 신비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호수이다. 톈산산맥이 둘러싸고, 태양과 바람이 어루만지는 이식쿨은 인상적이고 살아 있는 모습을 띠고 있다. 아마도 연두색에서 청록색으로 다채로운 음영을 만들어내며 빠르게 바뀌는 물 색깔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그런 아름다움을 기리기 위해 매우 기상천외한 이야기들을 만들어 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칭기즈칸과 스키타이인들의 보물이 이곳에 묻혀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2005년의 발견은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먼저 그리스도 시대의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14세기의 마요르카 섬과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을 다룬 후 다시 현대로 돌아와 살펴볼 것이다. 자, 이제 역사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자.

마태오는 예수의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네 명의 복음사가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세리였던 마태오는 예수의 제자가 되었고, 예수의 부활과 승천을 지켜본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마태오는 최초의 히브리어 복음을 쓰고 그것을 전도했다. 그리고 시리아에서 순교했고 유골은 150년 동안 그곳에 보관되었다. 마태오 사도를 따르던 사람들은 박해를 피해 달아나며 그의 유골을 지금의 중앙아시아로 추정되는 ‘아시아 내륙 깊숙한 곳’으로 가져갔다. 이 같은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카탈루냐 세계지도

“이곳은 이식쿨이라 불린다. 이곳에는 아르메니아 수도원이 자리 잡고 있는데, 사도이자 복음서 저자인 마태오 성인의 유골이 있었다고 한다.”

지도에서 직선으로 예루살렘과 연결된 동양 부분에 있는 한 건축물에 이러한 설명문이 실려 있다

이른바 카탈루냐 세계지도는 마요르카의 지도 학교에서 제작되었다. 제작자는 ‘지도계의 달인’이라 자칭하던 유대인 책 채식사 아브라함 크레스케스Abraham Cresques였다. 샤를 5세 시대 이후로 프랑스 왕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지도는 6장의 양피지로 구성되어 있다. 첫 두 장에는 우주구조론, 천문학, 점성술을 다룬 텍스트가 담겨 있다.

나머지 네 장은 실제 지도를 구성하고 있는데, 세계에 대한 지식과 그 시대의 여행 문헌을 삽화로 보여 준다. 여행 자료들 중에는 마르코 폴로Marco Polo의 《동방견문록Il Milione》도 들어 있다. 설명문이 달린 중요한 건축물은 피라미드식 지붕을 갖춘 로마식 대성당이다. 이 건물은 키르기스스탄의 이식쿨을 연상시키는 기다란 모양의 호수 위에 서 있다. 하지만 어떻게 아르메니아 수도원이 톈산산맥의 이 먼 지역에 등장한 걸까? 계속 읽어보기 바란다, 더 많은 불가사의가 숨겨져 있으니.

키르기스스탄에는 1세기부터 아르메니아계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번성하고 있었다. 보옴 협곡을 통해 이식쿨과 연결된 추이 골짜기에서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예를 들면, 중세 그리스도교 도시인 타르사켄트에서 아르메니아어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글씨가 쓰인 십자가가 새겨진 돌이 발굴되었다. 십자가 아래에는 시리아어로 “이것은 아르메니아 주교 요한의 무덤이다”라고 새겨져 있다. 날짜는 아르메니아력으로 772년, 즉 1323년에 해당한다.

1980년대에는 추이 골짜기를 돌아보며 살피는 특별 임무를 맡은 러시아 관리 니콜라이 판투소프Nicolay Pantusov가 타르사켄트에서 600개가 넘는 묘비를 발견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샘플을 보낸 결과 그것들은 아르메니아와 시리아의 그리스도교 비문으로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이식쿨에 있는 수도원에 대한 소문은 어떻게 유럽에 전해졌는가?

14세기 초에 요한John 교황은 동 아르메니아와 이란에 가톨릭 선교단을 파견했다. 그 목적은 대주교 관할구의 설립이었다. 대학이 설립되었고 유명한 신학 서적이 아르메니아어로 번역되었다. 이식쿨에 있는 아르메니아 수도원에 대한 소문은 실크로드를 오가는 아르메니아 상인들을 통해 이곳 도미니코회 수도사들에게 전해졌다. 이제 그들에 대한 소문은 수도사들을 통해 유럽에 전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소문은 훨씬 더 일찍 유럽에 알려졌을 수도 있다. 1254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의 헤툼Hetum 왕은 몽골제국의 황궁에 다녀왔다. 그는 당시 이식쿨 호수의 남쪽 연안을 따라 이어져 있던 대 실크로드를 지나갔다. 돌아와서는 자신이 여행 중에 본 놀라운 일들을 사람들에게 말해 주었다. 시리아에 살고 있던 교황 특사들과 기사단원들, 시리아 항구에서 무역을 하고 있던 이탈리아 상인들이 헤툼의 이야기들을 유럽에 알렸을 수도 있다.

왜 이식쿨인가?

인도-아리안족과 다른 유목민들의 교차로에 위치한 이식쿨은 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로 2,500년 전에 선진 문명이 존재했음이 입증되고 있다. 고고학적 탐험으로 놀라운 것들이 발견되었다. 뛰어난 솜씨로 제작된 제사용 솥, 청동거울, 마구와 금줄로 만든 고리,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동전 등이 출토되었는데 모두 2,500년이나 된 것들이다.

호숫가에 있는 마을 중 하나인 스베틀리 미스(밝은 망토)는 이 극적인 역사의 일부를 간직하고 있다. 중세 시대에 이곳에는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교 수도원과 두 개의 아르메니아 수도원이 있었다. 1888년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황제는 옛 수도원들이 있던 자리에 성삼위 러시아정교회 수도원을 세울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30년이 안 되어 10월 혁명의 여파로 수도원은 다시 잿더미로 변했다.

19세기 말 제정 러시아군대의 장군이자 중앙아시아 탐험가인 바론 카울바르스Baron Kaulbars가 이곳을 찾았고,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성삼위 수도원에서 멀지 않은 튜프 강과 코이수 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수중에서 고대 도시의 유적이 발견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도시에는 마태오 성인의 유골이 보관되어 있던 아르메니아 수도원이 있었다.”

비슈케크와 중앙아시아의 대주교 블라디미르Vladimir는 저서 《투르크 총대주교의 후예들의 땅The Land of Descendants of Patriarch Turk》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키르기스 땅, 특히 이식쿨 호수가 사도 마태오의 유골함이 모셔진 가장 위대한 그리스도교 성지의 본거지였다고 믿을만한 이유들이 있다.”


현대의 발견

∙ 스베틀리 미스에 학교 기숙사를 건축하던 중, 인부들이 사람의 유해를 우연히 발견했다. 유해 중 하나에는 화려하게 수놓은 예복과 은으로 만든 정교회 십자가가 있었다.

∙ 키르기스 과학원의 블라디미르 플로스키흐Vladimir Ploskikh 부원장이 이끄는 고고학팀은 이식쿨 호수의 수중에 잠겨 있는 도시의 존재를 입증했다. 도시는 때로는 점진적이고 때로는 갑작스럽고 재앙을 불러일으킨 규칙적인 해수면 변화 때문에 물속에 잠기게 되어다.

∙ 2005년 키르기스 과학원의 카미셰프Kamyshev 부교수는 퀴르멘티 마을에서 그리스도교 복합 건물이 들어있는 동굴을 발견했다. 바위를 파서 만들어진 건물은 산비탈에 숨겨져 있었고, 2미터의 복도와 30개의 수도원 암자로 구성되어 있다. 건축 원리와 건물의 세부 형태(우아한 아치와 둥근 천장들)는 중세의 아르메니아 수도원을 연상시킨다.

이것들은 블라디미르 플로스키흐가 이식쿨 호수의 동쪽 연안에 있는 퀴르멘티 건물이 사실상 전설 속 아르메니아 수도원이라고 믿게 된 근거이다.

마태오 성인의 유골함이 거기에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지만 고고학자들은 그럴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고 생각한다. 이 수도원은 안전상의 문제 또는 다른 이유로 인해 버려졌을 텐데, 아마도 수도사들은 더욱 안전하고 새로운 장소를 찾아 다른 곳으로 유골함을 옮겼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로 가져갔을까? 가까운 곳인가 먼 곳인가? 또는 유골을 나누어 여러 곳에 묻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결론

마태오 성인의 죽음과 그의 유골이 묻힌 장소를 둘러싼 진실은 여전히 논쟁이 진행 중이다. 후보지로는 몇 곳이 꼽히고 있는데, 이탈리아의 도시 두 곳, 독일의 도시 두 곳, 심지어 이라크도 포함되어 있다.

역사의 풀리지 않은 다른 많은 수수께끼들과 마찬가지로, 발견은 더 많은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우리가 그것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이러한 성지가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 성지는 때가 되어야만 스스로 세상에 드러날 것인가? 마태오 사도의 유물을 계속 찾아보고 확실한 답을 주장해야 할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미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답을 얻었다. 과거에 우리는 실크로드가 카펫, 비단, 향신료 등 상품의 교역을 촉진한 길로 알고 있었다. 이제는 실크로드가 그 이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상, 에너지, 신조도 대 실크로드를 따라 전파되었다. 유목 문화와 정주 문화가 이곳에서 만나 매우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충돌하고 혼합되었다. 이제 실크로드는 시간과 공간을 잇는 매혹적인 길로 인식된다.

이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바가 아니겠는가?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이해하는 것 말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찾고 있던 와중에 다른 것을 찾아냈다는 사실 때문에 발견의 기쁨이 반감되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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